이런저런 얘기들 52

Posted at 2010/01/11 09:20// Posted in life in Seoul


얘기를 하자면 길지만, 나는 스물 한 살이다.
아직 충분히 젊기는 하지만 이전만큼 젊지는 않다. 만일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일요일 아침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다. (70) 
ㅡ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하루키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척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하루키 책이 처박혀 있었다. 분명 예전에 읽었음이 분명한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 책들을 재독 중이다. 그리고 스물일곱은 이전만큼 젊지는 않지만, 아직 충분히 젊은 나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원래 술보다 커피를, 북적이는 분위기보다 '다이다이'를 선호해 온 그동안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요즘은 사람들과 술먹고 노는게 재미있어서 미치겠다. 이 유쾌하고 멋진 신세계를 왜 이제야 깨우쳤나 싶을 정도로. 며칠 전에도 자정 넘어까지 전주연 49기들이랑 놀다가 다들 너무 흥에 겨워 조만간 엠티가기로 했다. 아니 근데 신기한 건 계열사 동기도 아니고 겨우 일주일간 합숙한 그룹 인턴 동기인데 이년만에 늦바람나서 서로 하루가 멀다하고 연락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더 신기한 건 그 시절 미처 몰라봤던 오빠들이 현재 내 주변의 인맥을 통틀어 가장 나이스한 바첼러로 성장했다는 거다. 사람은 오래 만나고 볼 일이다.

대화 주제 중에는 삼성인과 비삼성인의 대립,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삼성인들을 향한 비삼성인들의 끝없는 야유 및 질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군가 고백한, 삼성은 좋은 회사일 수는 있겠지만 절대 좋은 직장은 아니라는 정의가 인상적이었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그들의 삶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취업희망직장 최상단에 삼성전자를 올려놓는 대학생들의 착각이 한심할 정도다. 

나의 엑스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밤에 술먹고 있으면 남자가 데리러 와야하고 데이트 때마다 매번 집에 바래다주는 것을 당연시하며 백화점 가면 이거저거 사달라 요구하는 여자친구에게 시달렸거나 시달리고 있는 오빠들은 나를 이상적인 연애녀로 인정했다. 난 술먹어도 집에 혼자가고 데이트하고 나서도 혼자 들어가는 데다가 필요한 건 내가 스스로 구입하는 쿨한 녀성이니까. 그렇게 듣고보니 남자친구가 담배피워도 뭐라고 안하고 여자친구들이랑 놀아도 뭐라고 안하고 밤늦게 술마시고 놀아도 뭐라고 안하는 나는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애인인 것 같다(폭소).

주변의 해당 케이스가 다섯손가락이 넘어갔기 때문에 조심스레 가정하건대, 성실히 사회생활과 연애생활을 향유중인 이십대 후반이라면 여자는 자발적으로 결혼을 슬슬 염두에 두기 시작하고 그 때문에 남자는 비자발적으로 결혼을 강요당하기 시작한다. 그럼 자발적 여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 이야기를 수면에 올려놓게 되고 비자발적 남자는 결혼제도 자체에 대한 의문, 아직 어린데 인생 더 즐겨야되지 않겠느냐는 고리타분한 결혼=무덤 공식, 이 여자가 과연 평생을 함께할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 등에 시달린다. 직장 다니는 삼십세 이전의 여자가 결혼에 대해 가지는 극도의 호기심 및 절박함, 신중함, 조급함을 같은 처지로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녀들의 처지를 백퍼센트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렇게 오래 만나왔는데 이제와 나자빠지는 무책임은 뭐냐,고 남자만 비난하는 것도 사실 부적절하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심각해야 할 선택의 기로에서 뒤늦게 후회하지 않기 위한 최후의 보루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양쪽을 다 이해한다 쳐도 여자들이 불쌍한 건 어쩔 수 없다. 적어도 결혼에 있어 그녀들은 약자다.

비즈니스로 만나는 남자들 중 내가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갖는 Y기자는 친오빠가 일러주듯 진지하게 충고했다. 당신은 이 험한 남자들 사이에서 일하기엔 아직 몰라도 한참 모른다. 세상 남자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한 애들이 아니다. 많은 미혼 남성들이 스스로 벌어들이는 고정 수입이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르게 되면 절제력을 유지하기 힘들어 한다. 단적으로 내 나이대에서 빚이 없는 남자를 찾기 힘들다. 그게 진짜 단어 그대로 신용대출인 경우도 있고, 차 할부금이나 집 대출금일 수도 있는데, 어쨌건 빚은 빚이다. 주식이든 포커든 고스톱이든 도박 즐기는 수위가 위험한 남자들도 부지기수다. 바람 피우는 것을 어떤 이유로든 미화시키는 남자, 돈을 주고 여자와 어울리는 것을 비즈니스로 정당화하는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매의 눈으로 잘 골라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들었다는 것만 빼면 꽤 인상적인 충고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가 최근 구입한 일시불 풀옵션 투싼ix와 이 폭로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 듯싶다.


올 초엔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다른 방식으로 전해들었다. 'C=술+여자+도박'의 공식이 있다더라. C의 총량은 일정하고 개인차에 따라 요소의 프로포션만 달라진다는 거다. 여자가 없으면 술과 도박이 있고, 술도 도박도 안하면 여자가 백퍼센트라는 뜻인데, 이 놀라운 수학적 발견에 대해 나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여자도 물론 있겠지. C=술+남자+쇼핑이라든가.

이년차 직장인에게 삶의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람들은 나에게 일 외적인 부분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면 이제부터는 정말 사는게 무기력해질 거라고 경고했다. 라틴 댄스, 일본어 회화, 재즈 피아노처럼 네가 염원하던 것들을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중요한 건 현실적 여가가 아닌 마음의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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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11 16:40 [Edit/Del] [Reply]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 열혈 애독자1人
  2. 2010/01/11 19:36 [Edit/Del] [Reply]
    다음번 회동땐 일취월장한 주량 기대하겠습니다.
  3. 2010/01/12 19:28 [Edit/Del] [Reply]
    야근 준비하면서 읽었는데 왜 이리 맘에 와닿지..........
  4. 기긔
    2010/01/13 09:55 [Edit/Del] [Reply]
    재밌다 ㅋㅋㅋㅋㅋ
  5. 기긔
    2010/01/13 09:56 [Edit/Del] [Reply]
    Y기자님은 자기 얘길 한 듯 하네 , 100%...
  6. 2010/01/13 22:00 [Edit/Del] [Reply]
    나도 Y기자님이 자기 얘길 하고 있다고 (당연히) 생각했는데;;;;

Lovely comment to Ra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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