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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Posted at 2009/02/25 16:54// Posted in preference공교롭게도 이 영화를 보기로 결정하기 전, 우리는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명작영화 '클로저'를 복기하고 있었다. 달콤함과 설렘을 제외한 연애의 모든 어두운 면, 즉 유치함, 치졸함, 잔인함, 추잡함 따위의 진절머리나는 것들을 압축용기에 넣어놓은 것 같은 이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수백번도 넘게 남자와 여자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적나라한 대사들이 영화 속 적재적소의 장면에서 어찌나 빛나고 있는지를 찬양 중이었다. 그리고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았다.
별다섯개를 나열하는 것도 모자라 엄지를 치켜들고 내리는 것이 전부인 선정적 영화점수 매기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평가하자면, 이 영화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많은 이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실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기대하는 '어떠한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루함은 감독이 의도한 바 일수도 있다.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날 수도 없는 환경을 설정해놓고, 대신 아주 사소하고 별다를 것 없는 에피소드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지막에 얼마나 끔찍한 파국을 불러오는지 알려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며 그보다 몇 시간 전 입에 올렸던 '클로저'를 떠올린 이유는 이 두 영화 모두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르게 생겨먹은 생물체인지를 냉정하게 짚어주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의 곧고 굳건하며 정신쇠약자만이 찬성하는 다소 비현실적인 로망을 소망하는 여자, 그리고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나 여자의 꿈을 함께 좇아주기에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허리가 굽을 정도로 짓눌리고 있는 남자와의 조합이 그렇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애초부터 같이 살지 말았어야 할 안맞는 커플이라고 잔인하게 단정하기엔 이들의 성향이 남녀의 너무 일반적인 성격과 닮아있다는 점이 문제다. 여자는 남자를 이해하지만 과거를 그리워하고, 남자도 여자를 이해하지만 현재가 너무 무겁다. 덕분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들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게 내내 악다구니를 쓰고, 둘 다 피해자가 된 채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된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이 싸우는 장면마다, 남자와 여자가 말다툼을 할 때 보이는 전형적인 특성을 날카롭게 잡아낸 솜씨 역시 놀랍기 그지없다. 남자는 주로 다툼의 원인발굴 및 문제해결을 그 자리에서 모두 끝내려고 하고, 여자는 문제를 회피하거나 복기할 시간을 가지려 한다. 여자가 '됐어' '나중에 얘기하자'라는 말을 밥 먹듯이 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러나 모든 재앙은 바로 거기서부터 발생한다. 마치 꼬리를 흔드는 것이 전투 의지를 상징한다고 알고있는 고양이가 반갑다는 표시로 꼬리를 흔드는 개를 보고 달려드는 것처럼, 애초부터 소통방식 자체가 다른 그들은 말을 위한 말로 다투고, 해서는 안될 말까지 내뱉고, 때론 도를 넘어 정직을 고백하며, 포기한 눈빛으로 등을 돌린다.
다른 성(性)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명장면은 숲으로 가출하는 광란의 다툼을 벌이고 난 다음 날 아침이다. 프랭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아침을 준비하는 에이프릴을 보고 몹시 당황한다. 그들은 사이좋게 스크램블 에그를 먹고, 프랭크는 에이프릴에게 자신이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며 미소짓는 에이프릴을 보고 프랭크는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출근한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북받치는 서러움에 흐느끼다가, 아이들에게 마지막 전화를 걸고, 조용히 '해야할 일'을 하기 시작한다.
실상 남자와 달라서, 그가 그녀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여자는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잊으려고 노력하거나, 다 잊었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잊어버릴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삼을 뿐, 심연에는 모든 기억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영원히 남아있다. 억울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게 여자이므로. 차라리 에이프릴이 아침부터 화를 냈다면 그건 수습할 수 있는 문제였을 수도 있다. 기대와 너무 다른 에이프릴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프랭크는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미리 눈치챘어야 했다. 모든 불편함과 서운함을 한 잔의 술로 깨끗이 날려버리는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는 문제의 핵심을 짜증날 정도로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파악되면 오히려 냉정해지고 편안해진다. 이것이 영원히 용서할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갈등이라는 것을 파악해 버리기 때문이다. 스크램블 에그와 오렌지 주스가 그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베푼 아내로서의 예의라는 것을 프랭크는 몰랐다. 그리고 그걸 모르는 많은 남자들은 여자를 원망하고 여자는 그 남자에 눈물짓는다.
근본적으로 어떤 성향의 파트너를 만나 평생을 같이 하겠다고 다짐해야 하는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잔인한 현실과 막연한 꿈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순간에 터져나오는 감정을 어떻게 추스려야 하는지, 심지어 애정이 개입되지 않은, 배우자와 다른 이성과의 관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까지, 영화는 관객에게 너무 많은 숙제를 던져준다. 여주인공인 케이트 윈슬렛의 남편인 동시에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샘 멘데스 감독은 하얀 집과 푸른 마당, 그 곳에서 뛰노는 아이들로 대변되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부부에게도 비밀스럽고 추한 고민거리가 숨어있으며 고상해 보이는 그들도 결국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불안정한 관계인지를 동정없이 그려낸다. 또한 전작 '아메리칸 뷰티'에서 사람과 사람, 특히 세대간 소통의 문제에 집중했다면 이번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는 화성에서 온 남자들과 금성에서 온 여자들이 손을 잡고 사는 결혼이라는 위대하고도 대단히 비합리적인 제도를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대체 왜 이 골치만 아픈 연애를 굳이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 결혼에 대한 환상을 반드시 깨버려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실제의 모든 부부들처럼 나도 종국에는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저렇게 악다구니를 써야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상영이 끝나고 영화관을 나오면서도 뒷목이 간지럽고 가슴이 찜찜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 여운이 아주 오래 갔다.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생각하고 있거나,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연애애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이 반드시 봐야 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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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2009/05/17 05:18 [Edit/Del] [Reply]잘 보았습니다.